크리스마스 캐럴
/ 이주희


   1

 맞받아칠 겨를도 주지 않고 냅다 소리를 지르고 나가버린 남편은 온종일 전화 한 통 없었다
 팥죽 끓듯 부글거리는 속을 추스르려 쏘다니다 책방에서 찰스디킨즈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사들고 들어왔다
 퇴근한 남편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능청을 부리며 내놓은 건 '크리스마스 캐럴'이었다


   2

  화장실에서 윗옷 주머니에 넣어둔 손목시계를 변기에 빠뜨렸다
  유일한 결혼 예물이 순식간에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청구를 들을까봐 퇴근길에 소매치기 당했다고 둘러댔다

  다친 데 없으니 천만다행이라며 더 좋은 것으로 사주겠다고 했다

  창밖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리는 저녁이었다


 장님집 / 이주희


 1

 복덕방 영감에게 맛있는 음료수를 얻어 마시고 계약한 집은 버스 정류장 근처의 장님집이었다
 두 칸 방은 작지 않았고 마당 한가운데의 장독대가 번듯했으며 해당화가 핀 화단도 있었다

 그래도 옮기는 병은 아니지 않느냐고 친정아버지도 남편도 복덕방 영감에게 고맙다고 했다
 나는 마뜩찮았지만 전대를 찬 식구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따라 웃었다


  2

  장님들은 종친회 사무실을 찾아오듯 연신 들락거렸다
  어떤 날은 잔칫집처럼 왁자했고 또 어떤 날은 콩 튀듯 팥 튀듯 삿대질을 해댔다
  타닥거리는 지팡이 소리가 장구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부침개 냄새가 더 없이 고소한 날도 있었다


  그런 날마다 섭섭하지 않게 얻어먹으면서, 나는 장님집 식구가 되어갔다
  두 아이까지 데려왔다


얼굴 / 이주희


  잎이 성하면 꽃이 부실한 법이라기에 전정가위를 들었다


  어느 틈에 임신한 걸까, 콩알만한 봉우리를 잔뜩 달고 있었다


  입덧에 시달리며 열 달을 견뎌야 하는 얼굴


  나는 열매도 달지 못하는 동백의 도장지를 자를 수 없었다


데뷔 소감

알에서 벗어난 담판한(擔板漢) 

알에서 벗어나려고 오래도록 버둥거렸습니다. 막상 껍질을 깨고 나온 세상의 햇살은 뜨겁고 바람도 세게 불어오네요. 바람에 몸은 제대로 가눌 수 있을까 두렵습니다. 시인이라는 담판을 등에 지고 시마를 만날 때까지 마냥 걸어가야 한다지요. 얼마만큼 왔을까 궁금해도 담판이 너무 커서 고개를 돌려 뒤돌아볼 수 없고 힘겹고 지쳐서 쉬고 싶어도 주저앉을 수 없다지요. 그래서 토끼처럼 편히 누워 늘어지게 잘 수도 한눈을 팔 수도 없겠지요. 그러다 시마를 만나 너나들이를 할 만큼 친해지면 알천 시를 쓸 수 있으리란 꿈을 가져봅니다.

   공들여 껍질을 쪼아주신 맹문재 선생님, 정선태 선생님 고맙습니다. 시인이라는 담판을 짊어지고 걸을 수 있도록 길을 터주신 『시평』과 고형렬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여러 해 제 손을 잡아준 ‘시울림’ ‘시사랑’의 글벗들과 주부의 소임을 잊고 직무유기를 일삼은 저를 너그럽게 참아준 가족과 기쁨을 함께하렵니다. 꾀부리지 않고 꾸준히 걸어가겠습니다.


 
심사평

이 세계를 깊게 품어내길

  이주희 씨의 작품들은 이야기가 들어 있기 때문에 친밀감이 들고 귀에 잘 들어온다. 그렇지만 「크리스마스 캐럴」이며 「장님집」이며 「강진댁 식구들」 등을 들려주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대상과의 거리를 적정하게 유지하고 있어 결코 단순하거나 억지스럽지 않다. 이주희 씨는 이 세계를  보이는 대로 또는 느끼는 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성찰로써 그 본질을 인식하고 있는것이다. 이런 점에서 백석의 시세계를 계승한다고 본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이주희씨의 작품들은 요즘의 신인들이 지나치게 형식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상황에 비추어보면 완성도 높은 시의 미덕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내용이 없으면서 형식을 위한 형식을 추구하는 시들이 과연 얼마나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시인다운 의식으로 이 세계를 담아낼 수 있을까?

  부디 정진해 우리 문학사에 유유히 이어져오고 있는 서술시를 계승하시기를, 다시 말해 질박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며 우주적존재들을 깊게 품어내는 시인이 되시기를 기대한다


                                                                    고형렬.  맹문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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